주보성인
주보성인 정하상 바오
작성자
테스트성당
작성일
2026.03.10
조회수
18

성 정하상(丁夏祥) 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부친은 실학자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을 연구하고,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했다. 순교적 희생으로 진리를 증언한 순교자인 아버지와 신심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세실리아의 인도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깨우쳤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나이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경기도 양주군 마재부락)의 큰 댁으로 낙향했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여교우 조증이 집에 의지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 가있는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돌아와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초석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 신부와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에 있는 주교를 상대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의 힘을 모아 추진했다. 정하상은 북경의 주교에게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使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했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으로 파견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을 밀사로 북경교회와 꾸준히 교섭케 했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 교회로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의 최고 수위권자인 교황에게 청원하기로한 세계적 경륜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과 의논후 "저희들은 교황성하께 두 가지 일을 겸손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두 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신부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 크나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 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 교황 청원문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만이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을 보장할 적극적인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동정 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보내졌고 그 곳 책임자인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전교 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여 마침내 1831년 9월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전기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됨)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